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왜곡/채널A (문단 편집) === 특수부대가 광주에 침입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채널A/채널A사진1.jpg]] >이주성 : …어, 제가 그 북한에 있을 때, 아마 북한에 있었던 분들은 다 누구나 알 겁니다. 5월 18일 그, 사건이, 이게, 북한군이 개입해서, 저, 그, 일어난 사건이라는 걸, 북한에서는 뭐, 그, 누구나도 다 아는 사실인데. 제가 한국에 와보니깐, 전혀, 그게 이렇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탈북자들의 주장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반례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탈북 군인 협회인 탈북군인협회의 대표는 "자유북한군인연합과 협력해서 일하면 좋겠지만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 탈북군인협회와 자유북한군인연합은 일하는 방법이 달라 같이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된다. 특히 보여주기 사업, 이벤트성 사업 등은 지양해야 한다. '북한 보급창고 등을 까고 나오자' 식의 선동적이고 과격한 활동이나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 는 주장 등도 현실과 맞지 않다" 라고 말한 바 있다.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6100&num=53887|#]][* 데일리NK. 2008. 「"김정일 정권 붕괴, 軍이 바뀌어야 가능"」] [[강성산]] 전 총리의 사위이자 [[김정일]]의 친척이었던 [[강명도]] 씨는 자신의 저서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북한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강명도 씨가 증언한 [[북한]]의 대남 공작원 파견 시도와 보고서의 존재 역시 진위를 가리기 힘들지만 확실한 것은 김명국 씨의 증언은 강명도 씨의 증언과는 모순된다는 것이다. ||"조선에 파견된 간첩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김중린]](金仲麟)은 3호청사의 전부서에 전화를 걸었다. 김중린은 당시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대남비서였다. 김중린은 남조선에 구축해놓은 정보망을 총가동해 사태 진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문제는 김중린이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이다. 김중린은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직후 정책 초점을 사태파악 및 분석으로 잡았다. 황금 같은 초기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김중린은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후 5~6일 지난 다음에야 [[김일성]]·[[김정일]]에게 최종정세 판단 보고서를 올렸다. 이 보고서는 '광주사태의 본질은 노동자, 농민, 도시 소시민, 양심적 인텔리 계급과 매판 자본가들을 등에 업은 군부세력간의 충돌' 이라고 정의하고 따라서 양자간의 갈등 관계를 증폭시킬 경우 이는 공화국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것' 이라고 밝혔다. 또 그는 '폭동이 광주에만 국한된 것이 문제' 라며 '만일 우리가 폭동을 남조선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대남사업의 결정적 기회가 마련될 것' 이라고 결론내렸다. 김중린은 비교적 사태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김중린의 실책은 광주민주화운동 응용·활용보다 사태 파악과 분석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였다는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한 것은 5월 18일이다. 그 후 사태는 22일에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5일 뒤인 27일 계엄군의 진압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은 종식됐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단 9일간 진행된 사건이었다. 따라서 김중린이 정세판단서를 김일성에게 올려 수표(재가)를 받았을 때쯤에 이미 광주민주화운동은 진압국면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당시의 얘기를 당대외연락부 6과 지도원이었던 임만복을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태가 터지자 김중린은 모든 대남 공작원들에게 비상대기령을 내렸다. 그러나 정작 3호청사 직속 청진 전투연락사무소(일명 121호 연락소)가 상부로부터 대남 침투 명령을 받은 것은 26일이었다. 북한 최대의 대남연락소인 청진연락소에는 전문 공작원만 1,200명이 있다. 명령을 받은 수십 명의 정예 공작원들은 남조선 침투에 대비해 쾌속정을 준비했다. 이 쾌속정은 일제 보트에 탱크 엔진을 장착한 것으로 최대속도가 60노트에 이른다. 그런데 이미 유서를 써놓고 쾌속정에 무기를 옮겨 싣고 있는 공작원들에게 돌연 작전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공작원들은 무기를 내려야만 했다."[* 강명도,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중앙M&B, 1995), 239-241.]||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 씨도 김일성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간첩을 파견하는 것을 거절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래서 평화라는 것이 거저 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 힘이 있어야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미국]]과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고 우리 국군도 더욱 강화하고 우리 여기서 안보체계를 잘 세워서 파견하는 간첩들이 맥을 못 추게 만들면 그것이 곧 평화입니다. 지금까지 그래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못 일으켰습니다. 김일성도 늘 그랬습니다. '지금은 안돼' 라고 말입니다. 제일 유리할 때가 광주 폭동 때였는데도 자꾸 이야기 해도 그것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더라도 실패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자유북한방송. 2007.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정은 종이쪽지」 [[http://www.fnkradio.com/board.php?board=fnkradiob201&page=4&command=body&no=119|#]]]|| 이렇게 고위 탈북자들 간에서도 큰 의견 차이를 보이니 특수부대가 광주에 침입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라는 주장은 거짓이다. 그 밖에 그 밖에 수많은 탈북자들이 광주엔 북한 특수부대가 침입했다는 주장에 반박하고 있다. 1981년부터 10년간 북한군 특수부대의 하나인 민정경찰(JSA)에서 사관장(준위) 계급으로 복무했던 김성호(가명·47)씨는 '5·18 북한군 개입설' 에 대해 이리 말했다. "군복무 시절 '광주 사건이 장기화됐다면 북한의 특공대가 참가할 수도 있었다' 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이 말조차 소문에 불과했다. 특수부대 병력이 600명이나 내려왔다면 그것은 게릴라 작전이 아니라 전면전에 해당된다. 한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에 특수부대 군인들을 대거 보내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소문에 불과한 얘기를 증거나 확인 없이 그대로 전달하면서 거짓이 진실이 됐다. 주목을 끌고 싶은 일부 인사가 잘못된 발언을 해 광주 시민들에게 상처를 줬다. 만에 하나 북한군이 투입됐다고 치더라도 최정예 군인만 선발됐을 특수부대원들이 당시 계엄군에게 몰살됐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정예 특수부대원이라면 계엄군 경계선을 뚫고 또 다른 지역으로 옮겨 작전을 수행했어야 맞다." 82년부터 20년간 국가보위부와 정찰국 장교(대위)로 복무한 박영기(가명·47)씨도 관련 증언을 하였다. "한국 내 소요 확산시 북한군이 침투할 것이란 얘기는 인민군 내에서도 존재했다. 그러나 당시 들리던 말은 소요 사태가 전국적으로 확대돼 남한 내 혼란이 확산될 경우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겠다는 내용이었다. 북한군이 만약 5·18 당시 개입했다가 북한에 돌아왔다 하더라도 해당 군인들이 전역할 때는 작전에 대해 비밀에 부치는 서약서를 쓴다. 더구나 대대급 규모의 작전이었다면 처음부터 극비리에 진행되기 때문에 소문이 날 수가 없다." 국내 북한군 출신 탈북자들도 난감해하고 있다. 북한재향군인협회 한 회원은 "상당수 회원들이 북한개입설을 허황된 발언으로 판단하고 있다" 며 "더 이상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고 말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2117551|#]] 정말 만에 하나, 수백명에 달하는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심각한 경계 실패에 해당하며, 특히나 그 당시 이 운동으로 인하여 전군에 경계태세가 내려졌던 마당에 이러한 규모의 북한군이 정말 국군의 감시에 발각되지 않고, 아무런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광주까지 내려왔다면 그것은 국군이 자동문이 되어주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므로, 오히려 이러한 주장은 북풍 사건처럼 전두환 정권의 요청에 의한 북한군 파견이라고 하는게 더욱 말이 될 지경이다. 그뿐만 아니라 김명국의 증언은 증언 내부에서도 아래와 같이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